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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인간과 악마의 경계선을 묻다

 

(주의! 이 글은 이미 영화를 본 사람을 대상으로 쓴 것으로 영화의 주요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우비는 입었지만 다 젖을 게 뻔하고 바닥은 이미 진흙탕이다. <곡성>의 오프닝은 전개될 스토리의 핵심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조금의 비에도 금방 물러지는 땅, 그리고 조금의 흔들림에도 바로 의심에 빠져버리는 연약한 인간의 마음. 의심에 빠져버린 인간의 선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곡성>은 누가 귀신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를 찾으라는 영화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이 배치한 플롯들은 무명(천우희 분),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찾으라는 듯이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종국에는 다시 인간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감독은 인간과 귀신의 이분법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귀신에 씌어 죽음을 퍼뜨리는 사람들,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는 귀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인간과 귀신의 접촉면이 넓어질수록 인간과 귀신의 경계는 점차 흐려진다.

 

위상이 전복되다

  종구(곽도원 분)가 처음 귀신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마을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외지인이 온 뒤로 마을의 사건이 시작된 것이라거나, 산 속에서 짐승의 날고기를 짐승처럼 뜯어먹는 것을 봤다거나 동네 여자에게 해코지를 했다거나하는 소문을 하나하나 수집해나간다. 그러던 중 다음 사건 현장에서 무명(이름 없음, 천우희 분)을 만난다. 미친 사람인 줄 알았던 무명은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상황을 설명했고 외지인이 귀신이며 모든 것이 귀신의 짓이라고 귀띔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쌓이는 단서들은 외지인이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 효진에게 들어간 귀신을 쫓으러 온 일광(황정민 분)도 반복적으로 무명과 비슷한 말을 한다. ‘그놈은 산 사람이 아니여.’ 딸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외지인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서 동네 친구들과 챙긴 연장들이 삶을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외지인의 집에서 좀비로 변한 동네 사람과 일전을 벌인 뒤 외지인을 쫓는다. 도주 중에 절벽에서 떨어진 외지인은 오히려 공포와 고통을 느끼며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딸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종구의 모습과 나약한 귀신의 모습에서 위상의 전복이 일어난다.

 

믿음을 흔들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성서 한 구절을 소개한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누가복음 2437-39)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육신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바로 육신이다. 분명히 죽음 이후지만 죽음 이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구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귀신과 산 사람의 구분은 믿음의 영역으로 남는다.

  영화에도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일광이 처음 종구의 집에서 굿을 하고 나서 종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놈 산 사람 아니여. 귀신이여.” 그런데 종구는 산 사람의 모습을 한 외지인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딸이 동네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같은 증상을 보이자 점차 귀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다. 달리 해석할 방법도 없었다.

  (여기에서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굿 신에 재미있는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굿 신은 단순히 일광이 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외지인과 무명의 대결이었다. 무명은 외지인이 볼 수 있도록 박춘배의 몸을 그의 집 근처에 가져다 놓는다. 그것을 확인한 외지인도 굿을 준비한다. 시장에서 오골계를 사와서 제단 앞에 거꾸로 매달고 박춘배의 사진을 제단에 놓는다. 일전이 끝난 뒤 무명이 외지인을 찾는다. 무명이 외지인을 없애지 않은 이유는 영화 종반부에서 무명이 밝혔듯이 귀신은 죽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사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결전이 있고 난 다음날 좀비의 모습을 한 박춘배가 원래 있던 곳이 아닌 외지인의 집에 나타난다. 놀란 외지인은 박춘배와 종구 일행의 충돌을 숨죽여 바라본다. 그렇다면 외지인의 집에 있던 수많은 사진들도 같은 역할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명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 그런데 딸 효진의 물건은 왜 거기에 있었을까. 아마 외지인은 효진의 미래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뭣이 중헌디. 그깟 중 하나가!”라고 소리치는 효진의 모습에서 외지인은 상대방임을 알 수 있다.)

종구의 집 앞에서 마주한 무명의 압도적인 힘을 확인한 일광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딸에게 일어난 일은 무명의 짓임을 종구에게 알린다.

  다음에 등장하는 종구와 무명, 이삼과 외지인의 대화가 교차되는 신에 영화의 핵심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딸을 찾는 종구에게 무명은 지금 집에 가면 가족이 다 죽는다고 강조한다. 자신을 믿고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야 가족이 산다는 뜻이다. 흔들리는 종구를 믿게 하려고 무명은 종구의 손을 잡는다. 육신이 있음을 확인시킨 것이다. 하지만 무명이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의 소지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종구는 무명의 짓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종구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들리는 닭 울음소리. 이삼과 외지인의 대화는 더욱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삼은 외지인에게 정체를 묻는다. 카톨릭의 엑소시즘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삼이 외지인의 정체를 묻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흥분한 종구가 외지인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이삼은 당신은 누구냐고 통역한다. 그럼에도 외지인은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손바닥의 성흔을 보여주며 이삼을 조롱하고 공포를 자극하며 그것을 즐긴다. 두 대화의 공통점은 귀신이 혼란에 빠진 인간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삼이 외지인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종구는 머리핀을 가진 무명에 대한 의심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살과 뼈가 있음에도 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산 사람임을 믿을 수 있을까.

 

부정(父情)과 부정(不淨)

  자신의 가족이 죽을 수 있다는 걱정이 한 가장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살인현장으로 달려가야 할 경찰 종구는 밥 먹고 나가라는 장모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딸 등교까지 시키는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며 겁 많고 게으른 경찰이다. 마을의 가정이 하나씩 깨져나가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종구는 우리 가정도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알림장은 더 이상 딸의 것이 아니었고 딸의 입에서는 저주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외지인의 집을 부수고 개를 죽이고 일광을 불러 비싼 굿을 한 것은 모두 딸을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딸이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외지인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외지인의 집에서 혼이 빠진 박춘배를 마주한 종구와 친구들은 처음부터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을 공격하는 박춘배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먹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외지인을 차로 치게 되지만 종구와 친구들은 시신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 여기까지가 무명이 밝힌 네 딸의 애비가 지은 죄다. 종구가 앞에 있음에도 무명이 지목한 네 딸의 애비는 외지인을 살해한 종구다. 그렇다면 무명의 앞에 있는 종구는 무엇인가. 바로 딸과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이다. 그런데 이 둘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딸을 구하고자하는 순수한 마음과 사람을 죽이는 악한 마음은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마치 대문에 말라버린 식물의 표정처럼 아내와 장모를 죽인 딸을 보며 종구는 절규한다. 그 끝에 나온 종구의 말에서 관객들은 딸을 지키고자 하는 그릇된 부정(父情), 즉 부정(不淨)을 확인하게 된다.

괜찮애, 우리 효진이. 아빠 경찰인거 알제? 아빠가 다 해결할껴, 아빠가.”

 

사람 낚는 감독이다

  관객들 사이에서 <곡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효진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고 일광과 외지인은 어떤 관계인 것인지. 혹시 장모나 아내가 귀신은 아닐지. 다들 영화 속에서 나름의 근거들을 모아 퍼즐을 맞추고 있다. 이글에서 해석하고 있는 부분도 결국 지극히 주관적인 것으로 분명히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감독은 미끼를 던져 분 것이고 관객들은 고것을 확 물어 분 것일 뿐이다.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곡성>은 피해자에 관한 영화라고 밝히고 있다.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을 완전히 닫고 싶지는 않다. 배배 꼬인 영화를 풀어 헤친들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저 배배 꼬인 채로 영화와 관객이 만나 반응하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