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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리코가 없는 "Il Trovatore"

  1866년 베니스의 페니체 극장에 만리코의 “타오르는 저 불길을 보라”가 울려 퍼진다. 만리코의 노래가 끝나자 오스트리아의 침략에 반기를 든 세력이 독립운동을 벌인다. 리비아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로베르토는 용맹한 오스트리아군 장교 프란츠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로베르토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된 리비아는 프란츠를 만나 결투신청에 응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리비아와 프란츠의 첫 만남이자 리비아의 “Il Trovatore”의 시작이다. 베르디의 “Il Trovatore”에는 스페인의 비스카야와 아라곤의 내전 중 서로 다른 진영에 있던 레오노라와 만리코의 사랑이 등장한다. 이와 비슷하게 리비아의 “Il Trovatore”에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독립전쟁 중 이탈리아의 귀족 리비아와 오스트리아의 장교 프란츠의 사랑이 등장한다. 독립운동을 돕던 리비아는 적국의 장교 프란츠를 거부하지만 계속되는 구애에 닫혀있던 마음을 열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리비아에게 프란츠는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음유시인 만리코였던 것이다. 익숙했던 오페라의 주인공이 실제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자 프란츠를 향한 마음의 장벽은 빠르게 무너진다.

  리비아와 깊은 사랑에 빠지지만 프란츠는 그녀의 만리코가 될 수 없다. 그녀가 프란츠에게 베르디의 “Il Trovatore”에서 느꼈던 만리코의 미덕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베니스 시민들이 “타오르는 저 불길을 보라”를 들으며 조국을 생각했듯이 용맹스러운 장교 프란츠에게도 노래 속 어머니는 조국 오스트리아였어야 했다. 하지만 프란츠는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두려워하며 리비아에게 목숨을 구걸한다. 이미 깊은 사랑에 빠진 리비아는 그런 프란츠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독립군 자금을 그에게 넘긴다. 리비아의 도움으로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런 상황은 오히려 프란츠를 혼란스럽게 한다. 전도유망했던 오스트리아의 장교가 부정한 방법으로 목숨을 구걸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극도의 그리움에 전장을 뚫고 프란츠를 만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만리코가 아니다. 그에게서 조국을 향한 충성스러운 모습과 그녀를 향한 사랑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노라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만리코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그의 신념마저 사랑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리비아는 적국의 장교일지라도 오스트리아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는 프란츠를 기대했다. 하지만 리비아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프란츠는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비소하고 울부짖는 적국의 장교일 뿐이다.

  리비아는 절망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조국을 등지고 프란츠에게 모든 것을 바쳤지만 허무한 사랑의 끝이 찾아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이것은 리비아가 그녀의 “Il Trovatore”에 만리코가 부재했음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비스콘티 감독은 슬픔에 찬 리비아를 레오노라에서 아주체나로 탈바꿈시킨다. 이전까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리비아의 모습이 레오노라였다면 오스트리아군에 프란츠를 고발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주체나다. 만리코일 수 없었던 프란츠가 형장의 이슬로 허무하게 사라진 뒤에 리비아에게 남은 것은 루나 백작 가문에 복수를 마친 아주체나의 슬픔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