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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결국 난파선 고양이가 되었다

 

  20세기 초의 일입니다. 1913년 퓰리처의 <뉴욕월드>지는 당시 화두였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옴부즈맨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옴부즈맨들는 재미있는 현상을 확인했습니다. 선박이 난파사고를 당했다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생존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됐다는 겁니다. 전말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하루는 <뉴욕월드>지 기자가 난파선 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생존한 것을 발견하고 기사에 이 사실을 실었습니다. 기사가 나오고 난 후 다른 언론사 데스크 담당자들은 이 사실을 놓친 자사 기자들을 질책했습니다. 또 다시 선박사고가 발생하자 타사 기자들은 문책이 두려워 있지도 않은 고양이 이야기를 기사에 담았습니다. 처음 고양이 이야기를 다뤘던 기자는 당연히 고양이를 언급하지 않았죠. 그러자 <뉴욕월드>지 데스크는 기자를 문책했습니다. 이 일 이후 모든 기자들이 난파선 기사에 고양이 이야기를 담게 됐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언론계, 특히 기자사회에 만연한 동류의식입니다. 기자나 언론사가 타사, 다른 기자와 생각과 이념은 다를지 몰라도 취재 행위의 원리는 대체로 같습니다.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 기자가 서로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의 취재 원리는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이유로 청와대 기자실 제도를 폐지하고 개방형 브리핑룸을 운영했습니다. 일부 언론사에게만 취재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정보 독점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일제히 반발했습니다. 보수언론, 진보언론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랬습니다. 당시 <미디어오늘>이 언론사들의 반응을 전하며 달았던 제목은 노무현정부의 오만과 독선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사들은 청와대의 조치를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비견하며 맹비난했습니다. 당시 언론인들에게 출입처제도는 그네들에게 보장된 취재권리로 인식됐습니다. 언론의 감시가 꼭 필요한 기관이나 기업에 더 밀접하게 다가가 들여다볼 수 있는 제도화된 시스템이라는 것이죠. 허나 실상은, 감시를 당하는 대상은 상대 또는 관리해야 할 언론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기자단에 포함된 언론사는 소수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독과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부상조하는 구조입니다.

  이런 제도화된 구조 속에서 언론은 스스로 권력이 됐습니다. 오래된 유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검사, 경찰서장, 세무서장 그리고 기자가 같이 밥을 먹으면 누가 밥값을 낼 것인가. 질문의 답은 식당주인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조선일보 사회부장은 우리는 정권을 창출할 수도 있고 정권을 퇴출시킬 수도 있다며 경기경찰청장을 협박했죠. 또 조선일보 블라인드 게시판에서 고 노회찬 의원 사망 기사 옆에 청룡기 우승 사진을 넣은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조선일보 기자여서 그나마 인간 취급 받고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밥 얻어먹고 다녔다며 자사를 옹호한 기자도 있었다고 하죠. 권력화된 언론의 이러한 행태가 비단 조선일보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대다수 진보언론의 언론인들도 자부심, 자신감이라는 포장된 형태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언론 보도 오류가 있고난 이후 언론보도에 대한 시민의 비판적 수용이 본격 시작됐다고 봐야할 겁니다. 그리고 현 정부 들어서서 언론의 권위가 추락하는 모습이 속속 목격되고 있습니다. ‘되게 할 수는 없어도 안 되게 할 수는 있다는 표현이 있죠. 권력이 줄어도 상대방이 두려워할 정도의 영향력은 남아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그나마 언론에게 남아 있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재명 건에서, 김경수 건에서, 손혜원 건에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속된 말로 모든 언론이 달려들어서 조지는데도그들은 언론 앞에 백기투항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저 인사를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는 비슷했을 겁니다. 흔히 보아왔듯이 기자들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고개 숙인 모습, 구속되어 형이 확정되는 모습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과거 형성한 시스템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오류를 줄이는 가장 확실하고 간편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도입부에 전해드렸던 난파선 고양이를 놓치지 않는 방법이 출입처제도입니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취재원과 접촉해 정보를 취득하고 기자단풀에 포함된 기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합니다. 이렇게 모인 정보들을 토대로 기사를 쓰면 다른 기자가 썼는데 나는 놓치는 불행한 사태를 피할 수 있습니다. 몇 달 후에 보게 되겠지만 예산안 통과 정국에 국회 예산소위 회의실에는 기자단 통틀어 1명만 들어갑니다. 기자단풀을 대표하는 기자라는 의미에서 풀기자라고 하죠. 이 기자가 내부 회의 과정을 취재해서 출입처 기자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가치 있는,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기사와 다른 독창적 기사가 나오길 바랄 순 없습니다. 그래서 여당 출입 기자는 여당 정치인처럼 사고하고 야당 출입 기자는 야당 정치인처럼 사고하는 게 이런 시스템에 의한 것입니다.

  조국 법무장관 인사 검증 국면에서 jtbc 보도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졌습니다. 가장 신뢰받는 언론사마저 다른 언론 보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가장 영향력이 큰 저녁뉴스에서 검증 없이 의혹을 그대로 전하면 파급력이 남다를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확인한 것은 jtbc 기자들도 시스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jtbc 기자들이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국이 정말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없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았을 때를 가정해보죠.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의혹이 근거가 없다는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입바른 소리를 하고도 그 시스템 안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요. 조국 후보자 면전에서 거만하게 질문하던 기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면 출입처 안에서 정보획득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까요. 2017년에는 출입기자단에 속하지 못했던 민영통신사 기자가 취재 어려움을 이유로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조국 의혹 보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 따른 추론입니다. 이번 과정에서 드러낸 언론의 광적 집착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허술한 보도는 비판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적 오류에 대한 시민의 감시가 없이, 원인에 대한 지적 없이 결과를 지적하는 것은 공허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난파선 고양이를 좇던 언론인들이 이제는 난파선 고양이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언론의 영향력은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에 달려있고 이것은 시민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언론의 보도를 스스로 검증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미디어의 발달은 정보 전파의 물리적 장벽을 낮추고 있습니다. 기존 시스템은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고 있지만 기득권인 언론은 초라하게 배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번 조국 인사 검증 과정의 보도 광풍은 난파선을 부여잡고 우리 배는 아직 괜찮아라고 호통치는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 외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언론계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시스템에 포함된 언론사 중에 영민한 자는 변화를 모색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큰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큽니다. 급속도로 가라앉는 난파선을 부여잡고 아직 살아있다며 호통치는 언론을 보며, 그럼으로써 침몰을 가속화하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오묘한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