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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념

조영남 인민재판의 진중권 변호사

 

  ‘조영남 사건이 조용해지는 듯 한데 진중권 교수는 아직 이 건에 집중하고 있다. 인터넷 언론을 통해 (여러 권위 있는 글까지 동원한)장문의 글을 두 편이나 공개했다. 적잖이 답답했던 것 같다. 두 글을 모두 읽어봤다. 대체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게 따질 것 없이 조영남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고 싸인만 된 것이라도 조영남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조영남 브랜드. 그림 구매자들도 그 가치를 산 것이란 걸 인정해야 한다.(반응을 보면 이미 인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진 교수의 주장에 공감한다. , 미학의 영역에서만.

  진 교수는 일종의 재판장에 들어선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재판장의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 재판장은 진 교수의 바람대로 윤리적·미학적 논쟁의 장일까. 아쉽게도 그렇게 되긴 어려울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고들이 그 재판장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원고들이 바라는 것은 따로 있다. 그래서 이 재판장은 대중적 인민재판의 성격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 피고는 당연히 조영남이고 피고측 변호사는 (지금은) 진 교수다. 그렇다면 원고는 누구인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조영남의 가치가 떨어지길 바라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가치가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쪽이다. 가치가 떨어지길 바라는 쪽은 조영남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대중과 미술계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미술계 학자, 업자, 기자 등이다. 그리고 가치가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쪽은 조영남의 작품을 산 사람들이다. 이번 재판에서 진 교수는 성실한 변호사다. 조영남에게 가해진 비난·비판의 허점을 잘 파고들었다. 조영남의 작품을 팝아트로 볼 여지가 워낙 충분했다. ‘조영남 브랜드는 실재하지 않은가. 하지만 재판에선 질 것 같다. 진 교수가 들이댄 미학적 이론이 무색하게도 재판에서 진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같은 우리말이지만 서로 대화의 층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진 교수가 재판에서 이기려면 조영남 작품의 훌륭함을 입증해야 하지만 진 교수도 이는 부정하는 분위기다.

  먼저 조영남을 비난했던 대중들의 바람은 뭐였을까. 여기에는 타진요회원들의 풀리지 않는 욕망과 비슷한 것들이 투영된다. 성공한 대중예술가에게 스탠포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배경이 있다는 점과 비슷하게 조영남은 성공한 대중 예술가로서 명문대 성악 전공자라는 배경이 있고 미술가로서 상당한 물질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조영남은 자유롭게 각종 기행을 보여도 잘 먹고 잘 살잖나.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이것은 미술계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전혀 간섭할 처지가 못 됨에도 조영남에게 태클을 건 것은 결국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손쉽게얻은 조영남 작품의 성공이 달게 보이지는 않았을 게다. 이 상대적 박탈감이 조금이라도 해소되려면 조영남의 미술적 성취, 혹은 작품의 가치가 평가절하 돼야 한다. 한편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지라도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을 만한 부분도 남아있다. 바로 조수 문제다. 조영남 자신도 현대미술에서 조수를 쓰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송기창 화백에게 그렇게 해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구매자들에게는 이 사실에 대해 함구해왔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사실이 무방비로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는 상황이 심각해진다. 성공한 대중음악가가 기성 미술가에게 쥐꼬리만 한 사례금을 주며 작품을 그리라고 했다니. 아마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염전의 이미지 혹은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여기서 한가지 짚고 싶은 부분이 있다. 조영남은 왜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됐음에도 송기창 화백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대가를 지불했을까. 아마도 조영남은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이 맞다는 확신 때문에 조수에게 적은 대가를 지불하는 식의 요식행위를 한 게 아닐지.)

구매자에게도 조영남 작품이 진품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진품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조영남 브랜드가 해체될 줄 알았더라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치환될 수 있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조영남 브랜드는 실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매자들도 후회하는 누더기 신세가 됐다. 사태 전에는 구매라는 행위로써 조영남 브랜드형성에 이바지했지만 사태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진 교수도 일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양측의 논쟁을 보고 있자면 영화 <왕의남자>에 등장한 대사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가 떠오른다. 서로 어디 있는지 모르면서 더듬거리는 모습.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는 대화는 종종 너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곤 한다. 지극히 맞는 말임에도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진 교수가 과녁 설정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대중문화의 영역과 순수예술 영역의 간극이요, (진 교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평가적 의미분류적 의미의 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