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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나도 <미생>이 불편하다



   드라마 <미생>이 나오기 전에 학교 선배로부터 웹툰 <미생>을 추천받았다. 만화 속 주인공의 캐릭터가 나와 비슷한 것 같다는 설명도 따라 붙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중반을 넘기기도 전에 페이지를 닫아버렸다. <미생>의 세계관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그 불편함은 드라마 버전에서도 이어졌다.

   <미생>이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매력은 끈적한 공감의 코드라는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미생>에 대한 극찬의 대부분은 실재할 것 같은 상황설정으로부터 기인한다. 주어진 상황 속에 절대 악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등장인물의 행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또한 대체적인 스토리 전개가 팀 단위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주효했다. 상위 직급의 인물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이 아닌 말단 팀 구성원 직급에서 바라보는 눈높이 설정은 대다수 시청자들의 경험과 맞아떨어졌다. 여기에 더해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등장인물 오과장-김대리-계약직 장그래가 착하게 성공하기를 바라는 수용자의 마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 밖에 등장인물의 손짓 하나에도 집중하게 만든 <미생>의 디테일 포착 능력도 매력적 요소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생>이 불편한 이유는 오리가 하늘을 날아버린 결말과 같은 작품의 스토리도 아니고 연기자의 연기력도 아니다. 작품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세계관의 문제다.

   <미생>은 조직 밖에서의 노력을 평가 절하한다. 주인공인 장그래는 고등학교 검정고시가 최종 학력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중퇴하면서까지 프로바둑기사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원인터네셔널이라는 거대 조직에 속하면서 그동안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장그래 스스로도 프로기사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숨기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몸부림친다. 조직에서의 갈등을 해쳐나가는 과정에서 바둑의 격언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건 반전의 장치일 뿐 잡기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한다. 다른 신입사원들도 마찬가지다. 안영이는 살아남기 위해 과거 경력을 숨겼고 장백기는 스펙의 허무를 시인한다. 이렇게 되면 오로지 조직원으로서의 노력만이 주목을 받는다.

   <미생>은 모든 등장인물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보는 시각에 따라 관련자에게 수긍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해서 제공하는 형식이다. 그러면서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의 과정과 사건의 합리적 해결지점을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도 결국 수용자의 뇌리에 남게 되는 것은 등장인물의 행위가 갖는 당위성이다. 나름의 이유를 가진 인물이 나름의 행위를 했고 나름의 이유를 가진 다른 인물이 나름의 행동을 통해 해결점을 찾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구조의 문제, 즉 문제발생의 근본 원인은 쉽게 잊히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차선의 해결점을 찾기 위한 인물들의 애절한 노력만이 부각된다.

   <미생>은 신드롬으로 발전할 만큼 우리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의 아픔을 사실감 있게 그렸다는 자타의 평가가 이것을 증명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딴 장그래법이라는 비정규직 보호(양산) 법률안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잖나. 하지만 <미생>이 가진 세계관을 뜯어보면 그간의 극찬은 과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생>의 세계관은 불합리한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조직원으로서의 개인에 집중한다. 갈등과 마주할 때마다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선택을 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수용자들도 나름의 이유에 공감하며 결과에 기뻐하거나 애달파한다. 수용자들은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그들을 응원하고 동시에 위로를 받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얻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이며 모두 힘들고 불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미생>은 문제의 존재를 얼핏 드러내지만 그 문제를 상수 취급하면서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약자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문제의 원인은 희미해지고 내부 구성원의 노력과 희생이 강조되는 것이다. 짙은 향기와 화려한 꽃에 가려진 가시. 이런 의미에서 작품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지적은 필요하다. 향기와 자태에 취해 가시에 다치지 않기 위해, 가시의 독에 취해 장그래가 4년 계약직이었다면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환영을 피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