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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걷다

불안세대, 지안을 꿈꾸다 tvN <나의 아저씨>



  성체 북극곰이 어린 북극곰을 동족포식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북극곰이나 불곰이 동족 새끼를 잡아먹는 일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보통 수컷 곰이 암컷 곰을 장악하려는 동기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최근 북극곰의 동족포식 이유가 과거와 다르다는 것이 기사의 핵심이었다. 지구온난화가 북극곰들의 행동양식을 바꿨다는 것이다. 북극곰은 빙하에 구멍을 뚫어서 사냥을 하는데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줄어들어 사냥터가 급감했다. 동시에 빙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고립되거나 바닷물 속에서 익사하는 빈도가 늘고 있다. 최근 북극곰의 동족포식은 생존을 위한 원초적 선택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우리 사회가 불안의 시대를 맞이한 것도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우리 시대의 신경증적 성격에서 신경증이 개인적 경험이 아닌 우리가 사는 특정한 문화적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20세기 후반 대한민국 경제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사실상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권이나 문화 같은 사회의 질적 성장보다는 경제 몸집 부풀리기에 전념하는, 균형을 잃은 성장방식을 택했다. 초고속성장의 부작용은 1997IMF 구제금융 사태로 나타났다. 국제 자본은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을 주입했다. 그 결과 늘어난 것은 양극화요, 줄어든 것은 사회안전망이다. 노인은 정년이 한참 지나도록 일을 해야 하고,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첫 직장을 찾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른다. 이들은 모두 불안의 시대 속에서 떨고 있는 불안세대라 할 것이다.

  올 봄 tvN에서 방송된 <나의 아저씨>는 불안세대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단순히 그들을 조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층대립이미지라는 틀을 통해 불안세대들이 겪는 사회적 모순을 드러낸다. <나의 아저씨>가 많은 시청자에게 호응을 얻었던 것은 불안의 시대가 가진 모순을 극복하려는 극중 인물들의 눈물어린 노력에 공감했기 때문일 게다. 단순히 판타지를 통해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시청자들 스스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도록 했다는 점에서 <나의 아저씨>는 드라마 콘텐트의 가치를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프레임,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부모

  <나의 아저씨>는 대립되는 이미지를 다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작품의 문제의식을 보다 명확히 드러낸다. 대립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상의 교집합은 이 시대 불안세대가 겪는 모순을 향해 수렴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립이미지는 엄격한 아버지모형과 자상한 부모모형이다. 이는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레이밍 모델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엄격한 아버지는 험한 세상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자녀에게 옳고 그름을 제대로 교육한다.

  <나의 아저씨>의 주요 테마는 삼안E&C ‘사내 정치와 후계동 지역공동체의 대비다. 삼안E&C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공간은 엄격한 아버지’, 동훈(이선균 분)의 고향 후계동 지역공동체는 자상한 부모라는 틀 안에 놓인다. 삼안E&C를 주무대로 한 도준영 대표이사(김영민 분)와 왕전무(전국환 분)의 파벌싸움은 엄격한 아버지모형의 특징을 드러낸다. 상대 파벌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사람을 보호하고, 같은 파벌 사람을 좋은 자리로 이끌며, 상대 파벌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통해 교훈을 굳건하게 세운다.

  반면 후계 공동체는 포용과 이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상한 부모모형의 특징을 보인다. 험한 세상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듬되 그 범위를 가정으로 한정짓지 않고 지역사회 전체로 확장시킨다. 적을 상정하지 않으며 사회구성원의 상처를 보듬고 포용한다. 또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된다.



 

욕구 피라미드 그리고 다층적 인간군상

  <나의 아저씨> 속 두 공간, ‘엄격한 아버지틀과 자상한 부모틀을 가로지르는 것이 지안(이지은 분)이다. 지안은 두 공간에 모두 속하면서도 속한다고 할 수 없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인물이다. 부르디외의 표현에 따르면 지안은 두 필드에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고 따라서 그 필드의 하비투스를 습득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속하지만 타자의 위치에 놓이는 인물이다.

  파견업체 소속으로 삼안E&C에서 일하는 지안은 다른 직원들에게 사실상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사내 구성원 중 누구도 회식 같은 주요 행사에 지안을 초대하지 않으며 지안 역시 이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 공간에 오롯이 융화될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체념도 보인다.

  또한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전국을 전전했던 지안에게 지역적 기반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상황에 따라 할머니 봉애(손숙 분)의 거처를 옮겨야 했던 장면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지안은 요양원 비용을 더 이상 낼 수 없게 되자 깊은 밤 도망치듯 자신의 단칸방으로 할머니를 모신다. 그리고 사채업자 광일(장기용 분)의 독촉을 피해 친구 기범(안승균 분)의 집으로 봉애와 함께 도망친다. 그 흔한 달구경도 마트 카트에 의지해야만 하는 처지, 봉애는 어느 곳에서도 평안할 수 없었다. 봉애는 국가의 사회안전망 안으로 편입되고 나서야 안정을 찾는다.

  ‘생리-안전-소속-존경-자아실현5단계로 표현되는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에 대입해보면 지안은 두 번째인 안전의 욕구단계에 머물러 있다. 지안을 오래 전부터 지켜봐온 고물상 춘대(이영석 분)의 표현대로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해도 지안의 가난은 오히려 이자를 붙이며 몸집을 키웠다. 음식점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이 남긴 잔반을 빼돌리거나 사무실에 비치된 믹스커피를 가져가 끼니를 때운다. 흔히 말하는 기초생활수급자다. 동훈은 3단계인 소속 욕구4단계 존경 욕구사이에 위치한다. 가족과 후계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 대기업 부장이라는 타이틀 덕에 사회적 인정도 받는다. 삼안E&C에서 정점에 오르려는 준영과 왕전무는 4단계 존경의 욕구5단계 자아실현 욕구단계 사이에 놓여있다.

  지안이 4단계 안전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피라미드 상위에 위치한 준영과의 거래다. 지안은 준영의 대표 연임에 방해가 될 동훈과 박동운 상무(정해균 분)를 회사에서 제거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기로 한다. 자신에게 고통을 안긴 엄격한 아버지프레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선택을 한 것이다. 지안은 동훈의 약점을 캐내려 동훈의 핸드폰에 도청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안은 엄격한 아버지체제 중심에서 동훈의 일상을 엿보며 자상한 부모프레임을 경험한다.

 

뒤집힌 시공간의 대비

  <나의 아저씨>에서 공간과 시간은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 낮은 삼안E&C의 박동훈 부장의 시간이고 밤은 후계동 삼형제 중 둘째 동훈의 시간이다. 대체로 낮에는 긴장과 갈등이, 밤에는 이해와 포용이 공간을 지배한다. 이것은 기존 드라마가 일반적으로 지켜왔던 문법과는 다른 접근이다. 기존 드라마는 낮을 이성의 시간, 밤을 감성의 시간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극한갈등은 주로 감성이 지배하는 밤에 이뤄졌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는 낮 시간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아버지프레임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작품에는 두 개의 대립되는 공간이 등장한다. 낮의 삼안E&C 사무실과 밤의 정희네. 삼안E&C 사무실은 차가운 주광색 형광등의 공간이고, 후계동 동네술집인 정희네는 온화한 노란색 백열전구의 공간이다. 삼안E&C의 보안을 CCTV가 지킨다면 후계동 지안의 집 앞은 앞집 사는 동훈의 후배 철용이 챙긴다.

  낮의 백색 사무실은 시종 긴장된 분위기가 지배한다. 가족이 아니라고 구분지어질 경우 엄격한 처벌이 부여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의 특수성은 회식자리에서 동훈의 부하직원 송과장(서현우 분)의 대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게 지금 학교랑 뭐가 다릅니까. 짱 밑에서 눈치 보면서 짱이 싫어하는 애들 다 같이 왕따시키고.” 학교 후배를 대표로 뒀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처우를 감내해야 했던 상사 동훈의 상황을 성토하는 장면이다. 송과장의 술자리 실수는 동훈과 송과장의 반성문으로 마무리된다. 낮의 차가운 일터에서 사람들은 보신을 위해 파벌을 만들고, 파벌은 갈등을 양산한다. 갈등 끝에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힘의 크기에 따라 우열이 나누어진다.

  반면 밤의 정희네는 덧셈의 공간이다. 정희네라는 작은 술집에 모이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도 있지만 과거 위기를 겪었거나 현재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엄격한 아버지프레임 속에서 인생의 쓴맛을 볼만큼 본 중년들이다. 동훈의 동생 기훈(송새벽 분) 때문에 연기자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유라(나라 분)는 이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것 같은데 전혀 불행해보이지 않아요.” 또한 동훈의 지인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지안을 거부감 없이 대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의 배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공동체의 태도가 드러난다. 어떤 일은 누군가에게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두 명의 신

  <나의 아저씨>에는 두 명의 신이 등장한다. 바로 삼안E&C의 장회장(신구 분)과 스님이 된 동훈의 친구 겸덕(박해준 분)이다. 두 공간의 신들은 그 공간의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이상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작품 속에서 두 신은 구성원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을 때 단번에 해결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다만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신의 존재는 대립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이는 또한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장회장은 삼안E&C의 최고 실권자다. 일상적인 업무는 도준영 대표 등 이사진이 맡고 있지만 그들의 배후에서 중요한 사안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가령 중요 사업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신상필벌의 방향을 결정한다. 주요 직위인사 심사가 있을 때에는 심판 역할을 담당한다. 한마디로 극 중 엄격한 아버지프레임 안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겸덕은 엄격한 아버지프레임에서 벗어난 초월적 인물로 묘사된다. 동훈 삼형제의 엄마 요순(고두심 분)이 자식들을 걱정할 때, 동훈이 아내 윤희(이지아 분)의 외도를 알았을 때, 겸덕은 그들의 짐을 덜 수 있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작품 후반부, 겸덕은 자신이 왜 속세를 떠났는지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는 데 결정타가 너였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봐야 박동훈 저 놈이다. 더럽게 성실하게 사는데, 저 놈이 이 세상에서 모범답안일 텐데. 막판에 인생 더럽게 억울하겠다.”

  메슬로우 욕구 피라미드에 비춰보면 장회장은 5단계 자아실현 단계바로 위에 위치한다. 반대로 겸덕은 1단계 생리 욕구바로 아래 위치한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장회장. 그는 엄격한 아버지프레임 속에서는 자아실현을 이룬 인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자신의 성취가 부질없다는 속내를 회사 임원들에게 털어놓는다. “왜 태어나서 이 고생. 물려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하려고 일을 이렇게 했을까.” 반면 겸덕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세상과 거리를 둔 인물이다. 그는 때때로 곡기를 끊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답을 찾아 나간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욕구까지 억제하면서 자기 내면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겸덕은 자기 스스로를 억압하는 동훈에게 충고한다. “지석이(아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을 인생 너한테는 왜 강요해. 너부터 행복해라 제발.”

 

<나의 아저씨>, 불안세대에게 묻다

  <나의 아저씨>는 대립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써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환경에 물음표를 던진다. 마치 작품은 시청자에게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거야?’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나. 시청자들은 작품을 보고 이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평안을 찾을 것인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관계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작품 속에서 동훈의 형 상훈은 엄마의 장례식에 대한 걱정을 입버릇처럼 늘어놓는다. “불쌍한 우리 엄마 장례식에 화환이라도 하나 제대로 박혀 있고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 문상객 채우려면 어떻게든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회사에 꼭 붙어있어야 돼.” ‘엄격한 어버지틀 속에서 낙오하면 모든 관계가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상훈은 오히려 타인의 관계를 유지시켜줌으로써 스스로의 인간성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상훈은 전 재산을 털어 지안의 할머니 봉애 장례식 돕는다. 동훈이 장례식에 쓴 돈을 주겠다고 하자 상훈은 이렇게 말한다. “이 감동을 훼손하지 마. 나 오십 평생 살면서 내가 이렇게 좋아 본 적이 없다. 나를 막 안아주고 싶어. 나는 내가 너무 좋아.” 타인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으로 자신 내면의 인간성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엄격한 아버지틀 속에서 높은 인격의 소유자로 그려지는 동훈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무너지면 가정이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가정을 지키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동생 기훈은 그런 형 동훈에게 울라고 말한다. “그렇게라도 형이 실컷 울었으면 좋겠어. 눈물 콧물 질질 짜 가면서 울었으면 좋겠어. 안 그러는 형이 너무 마음아파.” 동훈은 결국 짐을 내려놓기로 결정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 간 아들의 양육을 아내에게 맡기고, 본인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스스로를 향한 연민을 시작한다.

  작품 초반부에 동훈은 지안에게 이름의 한자 뜻을 묻는다. 이를 평안할 ’, ‘평안에 이름을 의미한다. 반면 동훈이라는 이름은 뜻풀이를 할 수 없다. ‘은 돌림자, ‘은 동녘 이다. ‘엄격한 아버지프레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보통의 중년을 떠오르게 한다. 지안은 엄격한 아버지프레임을 상징하는 삼안E&C 대신 자상한 부모모델을 상징하는 후계동 공동체를 택한다. 그리하여 지안은 동훈의 행복을 바랐고 동훈 역시 이에 동화되어 짐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불안세대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맞닥뜨린 이 사회에서 어떻게 지안을 찾을 것인가. ‘엄격한 아버지프레임 속에서 적을 상정하고 싸워나갈 것인가, 아니면 자상한 부모프레임 속에서 나와 타인, 우리를 위로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