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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뺄셈정치

뺄셈의 정치를 거부한다+(5) 혜화역 시위는 실패했다



  처음에는 답답한 느낌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지금은 안타까운 생각이 횡격막 안쪽을 쓸어내린다. 매주 혜화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집회를 보며 갖게 된 소회다. 사실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주저된다. 집회가 열리는 동안 그 공간은 고립과 배제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남성 기자의 취재를 허용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남성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뺄셈의 정치가 지배하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을 표방하는 그 집회가 성공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실패할 것이다. 이미 패배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비단 문재인 대통령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하는 따위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몇 년 전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20대 중반 큰 기대를 안고 새로 입학한 학교에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예술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이었기에 진보적인 생각이나 입장을 대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당시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운영됐다. 그 공간에서도 가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배설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한번은 김태훈 평론가의 기고문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던 글로 제목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여성 인권에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학우들은 글에 담긴 표현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 문장을 가지고도 여러 갈래로 입장을 쏟아냈다. 그 대화에서 몇몇 학생들은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결국 근본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문제와 거리가 있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몇몇 학우들은 대화 상대의 무식을 지적하며 페미니즘 관련 서적 몇 권을 소개하는 친절함도 보였다.

  먼저 김태훈의 글을 그대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짧은 글을 통해 독자를 설득하기에는 아주 큰 담론이었고, 글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무책임하고 공격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성평등 이슈가 대립의 이미지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지적할 만한 것이었다. 김태훈의 문제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에서 성평등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만인이 공히 인정할 정도의 성평등이 실재할 수 있냐는 것이다. 성평등은 GDP 등 경제지표처럼 수치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성평등은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여성이 우등하다고 인식되는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을 따름이다.

  혜화역 페미니즘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결과로써 성평등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관료의 비율이 어떻고, 민간 기업에서 여성 임원들 비율이 어떻다는 등의 현상을 따지는 것은 결과로써 성평등을 중시하는 태도다. 이런 수치들이 그 사회의 성평등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가시적 수치에 매몰되는 순간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는 고착된다. 가령 국회의원 공천에 일정 비율로 여성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규정은 여성의 경쟁력 없음을 강조하는 기재로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정으로서 성평등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발생하는 불합리는 완전히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며, 줄이는 것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여성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세우는 일이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담론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남성들도 동참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될 것이다. 동시에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또한 성 구분 없이 참여해야 가능한 영역이다.

  지금의 혜화역 페미니즘 운동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와 반대로 가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혜화역 시위를 바라보는 대다수 시민들은 그들의 행위를 분풀이, 한풀이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를 한없이 자존감 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공공에 나섰음에도 접촉을 거부하고 섬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상황이다.

  십여년 전 젠더문제에 관한 방송토론이 있었다. 한 여성 토론자가 반대 주장을 하는 남성 토론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요. 자녀분이 어떻게 되세요? 아들만 있으세요? 아니면…….”

남성 토론자가 답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까지 애가 없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여성 토론자는 깜짝 놀라며, 한편으로는 걱정하듯 말했다.

진짜요? 그러니까 이러시는구나…….”

이제 이런 수준의 대립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