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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 단지 젠더의 문제로 봐야 할까

 

  끔찍한 영상이 뉴스를 통해 다중에 공개됐다.

 

한 남성이 상가 계단에서 초조하게 움직인다. 잠시 후 한 여성이 화장실로 들어가고 조금 전 남성이 뒤따른다. 그리고 또 잠시 후 남성은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가고 처참히 살해된 여성이 실려 나온다. 그 모습을 본 연인은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끔찍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다음날 경찰에 붙잡힌 번인이 여자들이 무시해서 그랬다는 발언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 사건은 여성혐오범죄로 낙인 찍혔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두 글 때문이다.

 

 

 

차기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트윗이다. 문 전 대표는 인용표시를 사용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분이기에 가슴 아프고 미안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박 시장의 트윗을 보니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 시장은 더욱 분명하게 여성혐오범죄로 단정 지었고 현장을 보존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이쯤 되면 한국 사회는 여성혐오로 인한 테러가 만연한 사회임을 공인이 천명한 셈이 된다. 현재 분위기대로라면 강남역에 조성될 기억의 표식은 양성갈등의 성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여성들이 보인 분노의 크기를 보면 남성인 필자도 그동안 억압된 감정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물리적 실체를 갖는 현장의 추모 움직임에서 그 감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포스트잇, 흰 국화 그리고 촛불. ‘주세요 넌 살아았잖아는 이번 움직임의 표어 정도로 사용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유럽 등 서구국가들에서 불특정 다수의 죽음에 대한 애도, 가치 연대를 표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일 때 이런 모임을 갖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샤를리 에브도가 ISIS로부터 테러를 당했을 때에도 시민들은 추모와 연대의 모습을 보였다. 해당 언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언론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며 세계 여러 도시에서 나는 샤를리다를 외쳤고 꽃과 펜을 모았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추모와 연대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도 이번 움직임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피 묻은 흰 리본과 함께 나는 여자라서 죽었다라는 표어가 붙은 이미지도 돌아다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명확한 흐름으로서의 여성혐오가 폭발해 발생한 것으로 볼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범인이 여성을 혐오했는지 여부보다 더욱 집중해야 할 부분은 우리 사회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억압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온라인상에서 일부 남성들의 여성혐오가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 커뮤니티가 일간베스트(일베)’. 약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들은 본인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 ‘일밍아웃이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것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철저한 단절이다. 지난 주말 일베는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예비군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기획했지만 정작 참여한 유저는 고작 수 명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에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주 방송을 시작한 tvn<디어 마이 프렌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불알도 안 달린 게 차는 몰고. 꼴값을 떨어전형적인 가부장적 꼰대를 연기한 신구 선생의 대사다.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지금 우리사회는 이런 모습을 고릿적 꼰대로 취급한다.

  우리 사회에 남녀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정치, 경제적으로 여성의 진출이 적은 것만 보더라도 쉽게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남성을 타자화함으로써 문제해결을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학내 구성원만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여학우들과 차별에 관해 짧게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앞에 놓인 커다란 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지는 이러했다. ‘공부를 해봐라, 남성인 네가 이해할 수는 없을 테지만.’ 남성을 연대할 수 없는 존재로 미리 규정하고 담론에서 배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분노의 감정을 실질적인 남녀차별 해소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노력이 계속될 것인지가 앞으로 큰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단지 화만 낼 뿐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말 것인가.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먼저 사회 전반이 공감할 수 있는 범위에서 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번 사건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용하고 싶지는 않지만)강신주 박사가 예전에 언급했던 대로 약자가 약자를 공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범인은 여성들이 무시해서 그랬다는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여성혐오의 요소를 내포했지만 동시에 보편적 사회관계망 안에 편입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밝힌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도시치안 운운하기 전에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사태를 만드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다 같이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노인과 아동의 인권, 장애인의 인권, 젠더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등으로까지 자연스럽게 관심이 옮겨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