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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폭력적 접근.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인간에 대한 폭력적 접근.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

  조나단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유복하였지만 아버지가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도 생후 얼마 되지 않아 본가로 돌아갔기 때문에 고아의 몸으로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백부의 도움으로 더블린 대학의 Trinity College를 졸업한 뒤 생모와 연고관계가 있는 당시 정계의 거물인 William Temple의 비서가 되어, 그 집에서 기식하였다. 그 때까지의 생활이 후년의 풍자작가 스위프트의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후견인이나 다름없는 Temple이 죽은 후 정치에 야심을 갖게 되었다. 당대의 당파 투쟁은 휘그당원들과 그에게 반대하는 토리당원들 간에 처절하게 진행되었으며, 당시의 거의 모든 저명한 문인들이 이 편 또는 저 편에 가담하는 상황이었다. 1708년 휘그당의 단독내각이 성립되자 스위프트는 Bishop의 지위를 차지하기를 원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휘그당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1710년 토리당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토리당에 투신하여 당 기관지 Examiner를 통해 휘그당을 맹렬히 공격하는 변절을 보여주었다. 1713년 성직자로 임명되지만 곧 은퇴한다. 1728년 그와 비밀결혼을 하였다는 설이 있던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Stella가 사망하자 고독하게 남게 되었다. 그는 그의 성인생활의 대부분을 현기증과 귀먹음과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했다. 1730년대 말부터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나, 1742년에는 발광상태에 빠졌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74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릴리퍼트>와 큰 사람들의 나라<브롭딩낵>

  1부는 걸리버가 소인국 릴리퍼트에 머물며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물과 비교할 때 12분의 1로 축소되어 있다. 보기에는 가련하고 귀여운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이 조그만 조정에는 영국사회와 똑같은 법령제도가 있고 음모, 술책과 갈등, 모함이 가득 차 있다. 이곳에서 걸리버는 풍자의 주체로 등장한다. 소인국으로의 여행을 통해 스위프트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해서 인간 사회의 타락을 비판한다. 스위프트는 릴리퍼트를 묘사하는 것을 통해 은연중에 당대 영국에 대한 풍자를 한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릴리퍼트인이 인간들 특히 당대 영국인들의 모습을 풍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귀한 태생이나 인문적 소양이 아니라 줄타기 재주가 고위직을 얻는 방편이 되는 릴리퍼트의 현실은 월폴(Robert Walpole)에 의해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부요직이 배분되던 영국 현실에 대한 스위프트의 풍자이다. 또한 릴리퍼트에서 왕이 하사했던 여러 색의 실은 권력의 서열에 대한 상징과 어우러진다. 실제로 녹색실은 1703년 앤 여왕이 부활시킨 씨슬 훈장을, 홍색실은 1725년 조지 1세가 부활시킨 베스 훈장을, 청색실은 가트훈장으로 월폴에게 수여된 것이다. 또한 릴리퍼트인들이 달걀의 뭉뚝한 쪽과 뾰족한 쪽 중 어느 쪽을 깨야 하는 가를 가지고 “높은 굽파”와 “낮은 굽파”로 나뉘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분쟁이 “모든 진정한 신앙인은 편한 쪽으로 달걀을 깰지어다”라는 그들 성서의 한 구절을 두고 벌어지고 있다는 스위프트의 설명은 당대 영국의 종교・정치 분쟁이 달걀 깨는 논란만큼이나 하찮다는 비판이다. 걸리버의 능력을 시기한 대신들이 걸리버를 제거하려는 모습에서 릴리퍼트인들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그를 당장 죽이면 시체가 썩어 역병이 돌 것이다. 따라서 우선 눈을 멀게 하여 그를 무력화하고 천천히 식사량을 줄여 신체 크기를 줄이면서 굶겨 죽이자. 그러면 역병을 두려워할 필요없이 그를 해치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릴리퍼트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 걸리버는 도덕적 우월함을 보여준다.

  릴리퍼트로의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브롭딩낵으로의 여행에서도 신체의 크기는 도덕성과 비례한다. 릴리퍼트에서의 걸리버의 위치를 브롭딩낵에서는 브롭딩낵인들이 점하게 되고, 브롭딩낵에서 걸리버는 리릴퍼트인과 같은 신체적 크기와 도덕적 열등함을 상징하게 된다. 2부에서 스위프트의 풍자는 당대인들이 자신의 문명과 성과로 내세우는 것을 걸리버로 하여금 자랑하게 하고 이를 브롭딩낵 국왕으로 하여금 비판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2부에서 브롭딩낵 국왕은 1부에서 걸리버가 수행한 도덕적 우월자의 역할을 뛰어넘어, 당대인들이 따라야 할 전범의 역할을 수행한다. 스위프트의 풍자는 걸리버와 브롭딩낵 국왕간의 대화를 통해 주로 수행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브롭딩낵 국왕이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만을 고집하지 않고 걸리버의 의견을 충실히 듣고 그것을 분석한 후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신뢰할 만한 의견을 충실히 듣고 그것을 분석한 후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신뢰할 만한 의견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국왕은 또다른 접견에서 아주 세심하게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 전부를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또한 그는 그가 한 질문과 내가 한 답변을 비교하였다. 그리곤 나를 그의 손위에 올려놓고,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 네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내가 너에게 힘들여 얻어낸 답변으로부터 나는 네 종족이 자연이 이 땅의 표면을 기어다니도록 감내한 혐오스러운 작은 해충 중에서 가장 사악한 무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구나.

 

위 문장에서는 독자들을 “작은 해충 중에서 가장 사악한 무리”에 속하게 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쉽지 않게 함으로써 독자들을 풍자의 주체에서 풍자의 대상으로 확실히 전환시킨다.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덥드립

  3부에서는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푸타’국과 라푸타의 지배를 받는 ‘발니바르비’의 관계를 묘사함으로써 당시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지 백성에 대한 식민 약탈과 압박을 공격했다. 라푸타의 국왕은 어느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무력을 휘두르는 패거리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경우, 또는 평소에 바치던 세금을 거절하는 경우,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굴복시킨다. 첫 번째 방법은 온건한 방법인데, 그 도시와 일대의 토지 위에 섬을 떠있게 만들어서 햇빛과 비의 혜택을 박탈하고, 그 결과 주민들은 죽음과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죄가 한층 무거운 경우는 커다란 돌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집을 박살낸다. 그런데도 여전히 버티거나 내전을 일으키면 섬을 머리 위로 곧장 떨어지게 만들어 사람과 집을 한꺼번에 모조리 없애 버린다. 여기에서 라푸타는 영국을, 그리고 발니바르비는 아일랜드를 비유한 것이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복종시키기 위해 법률을 제정해서 상업무역을 억압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식민지인 발니바르비의 수도 레가도의 아카데미를 구경하면서 인간이 추상적인 프로젝트에 탐닉한 결과로 폐허화된 모습을 본다.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추출한다거나, 대변을 다시 원래의 음식으로 환원시킨다거나, 얼음을 열처리하여 화약을 만든다거나, 돼지로 밭을 갈게 한다거나, 거미로 비단을 염색한다거나, 건강한 허파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언어를 한 음절로 줄여 사용하자거나, 세계 공통어를 만들자는 등의 기괴하고도 허황된 프로젝트들을 나열함으로써 허황된 추상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것 역시 스위프트에게는 신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라퓨타 사람들의 기괴한 외모는 다름아닌 당대인의 정신상태가 건전하지 못하고 왜곡되어 있음을 뜻한다. 스위프트는 추상적인 과학, 수학 그리고 음악이론 따위를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사와는 무관하며 무모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것들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마법사의 나라 글럽덥드립에서는 마법사를 통해과거의 영국인들을 소환하여 그들과 현재의 영국인들을 비교한다.

 

나는 절박해진 나머지 과거의 몇몇 영국 향사가 소환되기를 바랐다. 한때 그들의 사는 방법, 음식, 그리고 복식의 소박함으로, 일을 하는 데 있어 공정함으로, 진정한 자유 정신으로, 그리고 나라를 위한 용기와 애정으로 유명했던. 현재의 영국인들을 과거의 영국인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감정이 북받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순수했던 영국의 미덕들이 선거철에 표를 팔면서 궁정에서나 배울 수 있는 모든 악덕과 타락을 습득하는 자손들에 의해 약간의 돈 때문에 어떻게 타락해버렸는지를 생각하면서.

 

말들의 나라 - 휴이넘

  말의 나라로 진입하면서 인간과 닮은 야후(Yahoo)를 맨 먼저 만난다. 이런 야후들은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말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말들이 걸리버를 대하는 태도는 걸리버가 예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인간의 모습을 한 야후들보다 오히려 말처럼 생긴 이들이 더욱 인간적인 애정으로 걸리버를 대한다. 물론 걸리버는 처음에는 말들의 행동이 질서가 있고 이성적이고 침착했던 나머지 마술에 의한 모습이라고 오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걸리버의 생각은 바뀌게 된다. 평범한 가축에 불과한 말들의 나라에서 목격하는 소박하면서 진지한 삶 이것이 가장 행복한 인간의 모습이자 상식과 이성의 기초 위에 세워진 스위프트의 이상이라 볼 수 있다. 말들이 사는 집안이 정결하게 정리된 모습이며 어린 말들의 겸손한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오물과 쓰레기로 황폐화되어 가던 실제 런던의 모습과 현격한 대조를 보인다. 특히 걸리버는 이들이 먹는 소박한 음식 때문에 한 차례의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휴이넘에 없는 것, 이를테면 의심, 불신, 거짓말, 거짓 진술, 권력과 재산에 대한 욕망, 정욕, 무절제, 악마, 권력, 정부, 전쟁, 법률, 처벌 등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휴이넘의 의미는 어원학적으로 “자연의 완벽함(the Perfection of Nature)”으로 이성적, 상식적으로 완벽함을 상징하고 있던 것에 반해 인간의 모습을 한 야후는 외양적으로나 심성적으로나 추함을 상징한다. 스위프트가 휴이넘을 묘사할 때, 말을 사람으로 하고 사람을 말로 여기며 휴이넘을 통치자로 야후를 통치받고 노역을 하는 지위에 놓았다. 휴이넘이 하는 모든 말은 사실이고 진실이며 모든 행동이 이성적이다.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지만 그것은 사랑과 우정 같은 좋은 감정이다. 야후는 휴이넘과 반대로 면상이 매우 흉측하고 추악하지만 전체의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하고, 그 성질은 인간의 모든 고약한 기질을 다 합쳐 놓은 것이다. 미덕이란 티끌만큼도 없고 온통 탐욕과 음탕과 질투와 증오의 덩어리다.

4부에서는 걸리버의 인간에 대한 혐오가 드러난다. 걸리버의 인감 혐오는 자신이 혐오했던 야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인간 혐오는 휴이넘 주인의 관찰에서 나타나듯이, 야만적인 야후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부여된 이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의 야후성을 극복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더 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즉 인간은 그 끔찍한 야후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완성된다.

 

내 주인은 우리 인간을 다음과 같은 동물로 보았다. 즉 종족의 몫으로, 어떤 우연에 의해서인지는 추측하지 못하지만, 이성의 작은 조각이 떨어졌으나 그것을 오직 원래의 타락을 더 악화시키는 데 이용하고, 자연이 부여하지 않은 새로운 악덕을 획득하는 데 사용한 동물로.

 

  걸리버의 인간에 대한 혐오는 결국 모든 인간들에 대한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휴이넘국에서 추방된 후 자신을 따뜻이 대해준 멘데즈 선장과 선원들을 기피한다던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 감정인 가족에 대한 애정을 거부한다던지 하는 것들은 모두 걸리버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 하는 근거들이다.

 

<걸리버 여행기> 어떻게 봐야 할까?

  “이것은 야후의 언어이다. 괴물이 질러대는 비명, 이를 북북 가는 듯한 인간에 대한 저주. 겸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인간다움과 수치심을 넘어서는. 생각에 있어서 더럽고, 광포하고, 난삽한... 이 목사가 비록 위대한 거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 사람을 야유할 것을 나는 주장한다.” - William Thackeray(1891)

 

  “스위프트의 위대함은 그의 모든 작품을 관류하는, 그가 인간을 혐오하는 핵심인 바로 그 ‘인간의 육체성’ 증오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강렬한 폭력에 있다.” - Aldous Huxley(1929)

 

  “그것은 너무 뒤틀렸고, 너무 부자연스럽고, 너무나 정신적으로 병들었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잘못되었다.” - John Murray(1954)

 

  위와 같은 표현은 4부의 해석에 관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걸리버 여행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소설로 분류했던 의견들이 존재했던 것을 보면 스위프트 풍자의 파격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 파격성의 핵심은 풍자의 대상이 소수 부패 집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로 확장됨으로써 독자들 역시 풍자의 대상 속으로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출판하기 전 포드(Charles Ford)와 포우프(Alexander Pope)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들에서 스위프트 역시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는 여행기를 끝마쳤고 지금은 그것을 필사하고 있다. 그것은 경탄스러운 것들이고 그리고 세상을 놀랄 만큼 교정할 것이다.”

“내가 내 자신에게 제안한 노고의 주된 목적은 세상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괴롭히는 것이었다. ....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하는 것의 잘못됨을 증명하고 인간을 차라리 생각이 가능한 동물로 정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혐오의 큰 토대 위에 내 여행기라는 건물은 세워졌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극도의 인간 혐오를 표출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극약처방을 통한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시도한 것일까? 어떠한 의도였던지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도록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걸리버여행기> 상식과 이성의 정치 / 강형 / 신영어문학 제 12집 / 1999

• <걸리버여행기> 광기의 타당성 / 전인한 / 안과밖 : 영미문학연구 제 12호 / 2002

• 반납과 공유 : 조너선 스위프트의 광기 / 전인한 / 중세르네상스영문학 제 11집 제 2호 / 2003

• <걸리버여행기>와 <鏡花緣>에 나타난 사회비판과 이상향 / 정영호 / 중국소설논총 제 18집 309p-335p /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