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당 대표가 떠밀리듯 종로 출마선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유승민 대표의 대답은 불출마입니다. 하나씩 주고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보수통합과 재건을 위한 계파 리더의 희생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받고 하나 더', 즉 배짱 튀기기로 봐야 할까요? 역시 후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정치권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이 보기에 황 대표는 정치 초보입니다. 유 대표가 생각하기에 황 대표는 능력에 비해 과도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유 대표는 자신과 황 대표의 처지가 반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황 대표가 종로 출마를 선언한 뒤 범보수진영 내 황 대표의 주도권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습니다. 홍준표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황 대표 주변에서 ‘홍준표가 이제 말을 듣지 않으면 목을 날린다’, ‘효수한다’ 같은 날선 발언들이 나왔다는 것이죠. 당연히 유승민 대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황 대표가 종로에 출마하면 유 대표도 수도권 험지에 출마해야 한다는 주장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죠. 만약 황 대표가 ‘좋은 타이밍’에 종로 출마선언을 해서 기세 좋게 전투의지를 밝히고 유 대표가 이에 화답해 수도권에 자신을 투신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면 보수 통합 분위기는 지금과 아주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런데 유 대표는 불출마선언을 함으로써 황 대표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때문에 이번 유 대표의 불출마 선언은 화합의 정치행보가 아니라 대립의지의 재확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유 대표는 자신이 수도권에 출마함으로써 보수표심 확장에 이바지하기 보다는 계파의 보스로 남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가진 걸 털어버리는 대신 자기 계파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겠다는 생각입니다.
유 대표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에는 그 어떤 확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확신일까요. 범보수진영이 총선에서 얻을 수 있는 의석수의 하한선은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그 의석수 규모 안에서 지분을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설령 통합이 아니라 선거연대에 머문다고 해도 새로 도입된 준연동형비례대표제로 인해 완전히 망해버리는 결과는 피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편으로 유 대표 입장에서 자유당이 물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변화입니다. 보수진영 내부에서 탄핵에 책임이 가장 큰 정치인으로 인식되는 것이 유 대표입니다. 자유당 내 친박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유 대표에 대한 비토 정서가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유 대표는 이러한 비토 정서가 해소될 때가 자유당으로 복당하는 적기라 인식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총선에서 자유당 내부의 큰 물갈이가 발생하는 것이 유 대표 입장에서는 좋을 수 있죠.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정치세력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는 결과가 나온다면 유 대표의 정치적 명분, 정당성은 더 커지게 됩니다.
유 대표의 불출마 결정으로 보수진영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황 대표는 감동이 없는 험지출마에 내몰렸고 유 대표는 총선의 열기를 더하기 보다는 꺼뜨리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긴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정치세력이 바닥을 치려면 한참 먼 것 같기도 합니다. 황교안 대표가 아직 대표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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