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시사평론가에 대해 다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두 번째 글입니다. 이 사람에게 팬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 글은 한겨레 하어영 기자의 ‘윤석열 별장 접대’ 단독보도에 대해 B평론가가 긴급방송을 한 것을 보고 쓴 글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이쪽 진영에는 유리한 판때기가 깔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겨레와 윤 총장이 진실게임을 벌이는 동안 조국은 슥 빠져있으면 된다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전망과 달리 대통령 지지율은 적지 않게 하락했습니다.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혼외자 논란을 일으켜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냈던 박근혜 정권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자유한국당, 보수언론 등 보수진영에서는 이번 정부도 채동욱 찍어내기 재탕을 하고 있다며 비난했습니다. 해당 보도가 나온 다음날 당시 조국 장관은 곧바로 민정수석실 차원에서 검증된 내용이라며 의혹을 해소했습니다. 당시 조 장관은 ‘이런 일은 빠르게 클리어해주는 게 맞다’는 입장이었다고 하죠.
27일 오후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문제의 발언이 나온 방송은 그날 오전에 녹음된 것입니다. 사실상 준연동형비례대표제가 실시될 것을 상정하고 한 발언이었습니다. 준연동형비례대표제가 실시되면 자유당이 정당득표용 새끼정당을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B평론가의 문제적 발언이 나옵니다.
이 : 저는 저쪽에서 반칙을 하면 우리도 반칙을 해야지.
김 : 비례민주당 만들어야 한다?
이 : 어. 선거는 전쟁이거든. 죽고 죽이기 게임인데. 저기서 반칙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싸운다? 그래서 민주당이 130석 가져가고 자유한국당도 그렇게 가져가면 그게 뭐야.
김 : 그렇지.
박 : 말이 안 되지.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저쪽이 반칙을 하면 우리도 반칙을 해야지’. 술자리에서 답답한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해당 방송은 팟캐스트 시사 파트에서 높은 순위에 위치한 방송입니다.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이것은 또 다른 정치혐오 조장에 다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정치 시스템은 어떤 의미입니까. 저에게 정치 시스템은 사회적, 국가적 위험부담의 최소화입니다.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의 바람을 대의하고 따라서 여러 욕구와 욕망을 대의 표출합니다. 이러한 욕구와 욕망이 그대로 실현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정작업, 즉 갈등과 투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투쟁 끝에 합의’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가장 느린 사회변화를 보장하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한 보 갈 것을 반 보 가도록 유도하는 제도이니까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내년 총선부터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여야가 합의해 선거법을 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저의 제안이 내년 17대 총선에서 현실화되면 저는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습니다.”
지긋지긋한 지역주의를 깨뜨릴 수 있다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일부를 나눠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국가적 대의를 실현할 수 있다면 상대 정치세력과 얼마든지 협의하고 타협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정치행보였습니다.
이번 선거법 개정은 작은 한걸음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주의를 타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왜곡을 바로잡고자 했다면, 이번 선거법 개정으로 그의 이상에 조금은 다가가게 됐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습니다.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명분있는 정치적 행보를 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2차방정식에서 고차방정식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B평론가 발언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명분이 무엇인가. 그것이 대다수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인가. 최근 발표된 KBS 여론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 대다수는 자유당의 정치 행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당과 같은 행보를 하는 것이 명분 있는 행위는 아닐 겁니다. 심지어 자유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다고 합니다. 자유당이 정당득표용 새끼정당을 동원했을 때 산술적으로 15석 안팎의 비례의석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역구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습니다. 수도권이나 PK 접전 지역구 의원들은 비례 의석 챙기려다가 지역구 참패할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새끼정당을 만들었을 때 새로운보수당, 우리공화당, 기독자유당 등은 이를 강하게 성토하면서 진영 내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때문에 유시민 이사장은 새끼정당으로 득 볼 수 있는 게 4~5석 정도일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겠죠.
‘저쪽이 반칙을 하면 우리도 반칙을 해야지’. 이 말에 담긴 가치는 무엇입니까. 승리와 패배라는 이분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때문에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차라리 낫다고 말하는 것이겠죠.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야 비로소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하는 데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반칙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결국 촛불혁명 이전의 ‘합리와 비합리가 뒤범벅이 되어 있는 야만의 시기’로 돌아가자는 망언에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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