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잘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있다. 노 대표가 단순 후원일 뿐이며 제도의 미비 때문에 법망을 벗어났을 뿐이라고 항변했다면 어떻게 됐을지에 대한 지적 말이다. 노 대표의 주장을 선의로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극소수, 아니 그마저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상상해보자. 노 대표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자연인 신분의 정치인이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자금력이 약한 세력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며 4000만원 수수 사실을,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됐을까. 모든 언론이 나서서 노 대표를 비난할 것이다. 그것은 비단 보수언론만이 아닐 것이다. 진보언론에서도 아주 매섭게 노 대표를 공격할 것이다. 특히나 삼성이 검찰에 촌지를 주며 관리를 해온 것을 폭로한 이른바 ‘삼성 X파일’ 폭로 사건과 정치권, 재계를 향해 내놓았던 비판들까지 끄집어내 그가 이중적이라며 비난할 것이다. 진보적 시각의 언론들 뿐 아니라 정의당 내에서도 노 대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라 예상한다. 노 대표 개인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그가 정치권 내 진보진영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20대 총선에서 정의당 당적으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심상정 대표와 노 대표뿐이었다. 매 총선 때마다 되풀이되는 결과다. 정의당 내 대중적 정치인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인물이 돈과 관련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 비난은 노 대표에게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노 대표의 유서에도 나타나있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민들 상당수는 정의당이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부분 동조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지방선거 전까지만 해도 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에서는 정의당을 손쉽게 민주당 2중대라 비난하며 차별화를 종용했다. 노 대표를 향했던 보수진영의 비판은 자연스럽게 정부를 향했을 것이라 본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과 금융소득 등 부자증세 강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 정책 등 진보진영의 아젠다로 분류될 만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생채기를 내려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혁명으로 10여년 만에 얻은 귀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점을 노 대표가 떠올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노 대표의 죽음은 노 대표가 짊어졌어야만 했던 짐의 무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노 대표가 떠난 빈자리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지금, 그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자들이 그가 남겨둔 짐을 조금씩이라도 나눠 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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