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JTBC <뉴스룸>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손석희는 <100분토론> 진행자로 남아있다. 토론 패널들도 다른 프로그램보다 더 화려(?)했다. 프로그램 시청률이 높아서 논객들이 출연을 선호했는지, 진행자와 제작진의 섭외능력이 뛰어났는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100분토론>을 보면 이슈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에 거의 매주 본방사수했다. 다소 차갑다고 평가 받았던 그의 토론 진행은 패널들이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토론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식히지도 않았다. 토론은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듣는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말을 끄집어 낼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말을 잘 듣는 손석희의 장점이 발휘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론이 의도한 방향을 유지하도록 물길을 트고, 요점을 빠르고 정확하게 정리해 말의 화학작용을 극대화시키는 능력, 모두 듣기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사 라디오프로그램 <시선집중>에서도 듣기는 계속됐다. 뉴스브리핑을 듣고, 이슈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여야 정치인들의 토론을 들었다. 또 발언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하는 이슈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서였을까, 강자든 약자든 <시선집중>을 통해 말하기를 원했다. 프로그램의 긴장감은 마지막 1분을 향해 갈수록 고조됐다. 마지막 30초, 마지막 40초가 남았다는 진행자의 말은 화자들로 하여금 에둘러 표현하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말을 듣느라 진행자가 클로징멘트를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종합편성채널인 JTBC 메인 뉴스 앵커로 자리를 옮기고서도 듣기는 이어졌다. 단순히 기자가 일방적으로 리포트를 전하는 것에서 벗어나 앵커의 물음에 기자가 답하는 형식이 본격 도입됐고, 전문가와 이해당사자 인터뷰도 모퉁이마다 배치됐다. 시국도 시국이었고 이슈를 대하는 시각이 다르기도 했지만 새로운 뉴스 진행 방식이 이슈를 더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당시 민주당 모 의원의 우려를 짧은 기간 내에 잠재웠을 정도로 JTBC 뉴스의 신뢰도는 급격히 높아졌고, JTBC 채널 브랜드 가치가 높아졌으며, JTBC의 다른 프로그램도 동반 상승했다. 세간에서는 JTBC 뉴스가 삼성 문제를 다룰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반올림 측의 목소리, 이건희 회장 성매매 영상 등 삼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보도를 이어갔고 최순실 테블릿PC 보도를 기점으로 JTBC와 삼성의 관계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최근 JTBC 뉴스를 향한 가시 돋친 시선이 느껴진다. 더 정확히는 손석희 앵커에 대한 비난이다. 지난 조기 대선 국면에서는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가거나 잘못된 여론조사 그래프가 나간 경우 비난과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JTBC <뉴스룸>은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해외 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재인 후보였다. 다만 국내 언론 환경을 고려해 공식 표명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물론 개인적인 추론이다.) 최근 손석희 앵커에 대한 비난은 MBC 시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촉발시켰다. 방송 중에 지상파 3사가 삼성의 보도 통제에 순응했다고 지적하면서 JTBC도 ‘대세’에 따랐다고 인식될 만한 그래픽을 내보냈다. 시청자의 따가운 눈초리는 지상파 방송사보다 JTBC에 집중됐다. 그동안 지상파 방송사들이 권력에 순응했음은 많은 시민들이 알고 있던 터였기에 ‘JTBC도 다르지 않았다’는 메시지로 읽혔던 것이다. JTBC는 중앙일보가 주축이 돼 설립된 방송사인 만큼 쉽게 삼성-중앙일보-JTBC-손석희라는 프레임이 형성됐다. JTBC가 반박성명을 냈지만 MBC <스트레이트> 제작진은 설득력이 약한 해명을 내놓았을 뿐이다. 당시 JTBC가 삼성 관련 보도를 했던 건 알고 있었고, 따라서 JTBC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스트레이트> 제작진은 ‘불필요한 오해가 생겼다’고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손석희 앵커는 왜 비난의 대상이 됐을까. 손석희 앵커와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에 대해서도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보도의 총책임자로서 책임이 막중하기는 하지만 문제 발생지점에 누가 있는지는 보지 않고 손석희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이런 식이라면 <아는형님>에 문제가 생기면 손석희를 욕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려운 것은 손석희의 영향력인 것 같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된 국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언론인. (전임 대통령 요구에 따라) 삼성이 압력을 넣어도 보도를 했던 언론인. 손석희의 <뉴스룸>이 정부에 대한 비판 보도를 쏟아낸다면, 정부를 무너뜨릴 만한 보도를 쏟아낸다면 과거의 불행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MBC 역시 JTBC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것 같다. 과거 MBC는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보수 언론 카르텔의 대척점에 놓인 대표 언론이었다. 하지만 지난 탄핵 정국에서 가장 처참하게 비판받는 언론으로 추락했다. 과거 MBC의 위상은 JTBC가 모두 흡수해버렸다. 따라서 MBC <스트레이트>의 JTBC 언급은 견제로 이해될 여지가 충분하다. 일종의 조바심이 드러난 게 아닐까. MBC는 보수 정권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해야 하며 상처의 회복은 더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이명박근혜 정부와 비슷한 정부가 들어서고 불합리한 언론 통제가 다시 시도된다면 MBC와 JTBC 중 어느 곳이 먼저 무너질까. 단언하기 쉽지 않지만, 만약 MBC가 찬란했던 과거만 좇는다면 다시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MBC는 구성원과 구성원의, 방송사와 시민의 규칙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불행히도 이 작업에 필요한 시간은 바라는 만큼 짧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JTBC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내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흔들릴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다만 지금까지 손석희는 잘 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손석희가 진행하는 방송, 손석희가 듣고자 하는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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