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짚지 않는 언론에 대해 다시 한번 실망을 금치 못한다. 지난 13일 한 북한군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판문점 남쪽 방향으로 뛰었다. 그는 뒤따라오던 북한군에 의해 다섯 발의 총상을 입고 쓰러진다. 우리 군 손에 구출된 그 북한군인은 응급 수술을 받고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여기까지가 이번 사건에 대한 가장 드라이한 브리핑이다. 여기에 북한군이 JSA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거나 우리 군 대대장의 활약상 등이 사항이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주목한 것은 해당 북한군인의 위생상태와 정의당의 원내대변인인 김종대 의원의 페이스북 글이었다.
김 의원은 북한군의 정전협정 위반 문제보다 북한군과 북한 내부의 위생상태에 더 관심을 갖는 언론을 질타했다. 김 의원이 이국종 교수 브리핑에서 환자의 개인정보가 공개된 것에 대해 문제를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브리핑이 있기까지 과정에 더욱 집중한다. 사람의 생명을 지켜내는 숭고한 현장이 이데올로기적 프레이밍에 갇히고 있다는 문제제기다. 개인정보 공개의 문제점은 논외하고 하더라도 실제 이 교수는 브리핑에서 환자의 건강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이런 환자는 처음이다’라는 발언은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해외 사례도 참고하고 있지만 의식이 없고 장기가 많이 손상된 사람의 회충을 어떻게 다스릴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 교수의 말을 곧바로 북한의 열악한 사회상과 결부시켰다. 한국사회에서 북측이 우리보다 체제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아마 모레사장에서 바늘 찾기 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사의 논조 강화에 활용하기 위해서? 상당수 언론은 전자일 확률이 크고 일부 수구 언론은 후자일 게다.
김 의원의 문제제기는 영웅 모독 논란으로 이어졌다. 우리 사회의 참 의료인인 이국종 교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는 것이 대부분 언론의 태도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논조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진단이 아주 표피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먼저 환자의 개인정보 보호와 국민의 알권리의 대립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어느 것이 옳다고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대한 의견개진은 우리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금기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언론이 귀순한 북한병사를 다루는 방법이다. 북한에서 넘어온 ‘군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까발려져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북측 사회 구성원에 대한 타자화다. 이런 태도의 밑바닥에는 동남아시아, 중동, 히스페닉, 아프리카 등 유색인종을 내려다보는 천박함이 깔려있다. 이런 언론들이 북한 구성원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언론은 북한 내 인권상황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김 의원이 영웅의 명성에 흠집을 냈는지 여부다. 김 의원이 이 교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명확한 판단에 앞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브리핑을 했던 이 교수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이 교수는 본인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 싸움터 한 가운데에 서게 됐다. 정치적 상황에 포섭된 의료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발언이 언론에 의해 제 멋대로 편취됐기 때문이다. 의료현장의 숭고함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는 행위에 기인한다. 다른 곳에서 의미를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찾으려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언론은 이 교수의 입을 통해 북한의 열악한 현실을 들추었다. 이 교수를 물구나무 세운 언론들, 이 교수는 과연 이데올로기 싸움의 전사로서 ‘영웅’인가.
중앙일보는 22일 오전 “이국종 "북한 병사 분변 얼굴에 튀며 수술, 의료진 인권은 없느냐"”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홈페이지에 실었다. 무슨 수로 대면인터뷰를 하루 10시간씩이나 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15일 6시간, 17일 세 시간, 21일 10시간 이 센터장과 대면 인터뷰를 했다’는 깨알 자랑도 곁들여졌다. 해당 기사의 목적은 ‘이 교수 띄우기’다. 이런 기사는 중앙일보를 포함해 소위 보수지로 분류되는 언론사 홈페이지 대문을 장식하고 있다. 논조는 비슷하다. 정의당 원내대변인 김종대 의원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이국종 교수가 이렇게나 의료계를 위해 고생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전사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 아래 깔려있다.
김 의원을 편들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김 의원이 비판의 방향을 명확히 했다면 더욱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이 교수 브리핑의 문제점과 언론의 활용을 동시에 병치함으로써 의도 전달이 불분명해진 측면이 있다. 여기에 더해 이데올로기 싸움의 전사가 된 이 교수를 재차 비판한 것이 옳았는지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비생산적 논쟁의 전선을 확장하는 꼴이 됐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언론 행태를 지적하는 언론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소위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언론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잘못했다가는 김 의원과 함께 세트로 넘어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는 진보 성향 언론도 비겁하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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