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장정일 작가의 글 두 편을 접했다. 두 글의 글감은 모두 이슬람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먼저 접한 글은 웬디 브라운의 저서 <관용>을 매개로 쓴 글이다. 여기에서 장 작가는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 두 가지를 규정한다. 일종의 논의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는 상대방을 아이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 근거한 조바심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 이슬람을 어른 대접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하겠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슬람의 야만적 행태에 대해서는 풍자와 조롱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이어진 비판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의 ‘진보라 일컬어지는 논객’들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들먹이는 등 사건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했다고 지적한다. 진보진영이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면서 테러의 실행자인 쿠아시 형제는 경제적 약자로, 샤를리 에브도는 여당-재벌로 치환했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좌파 지식인들을 공박한 글이다. 동시에 이슬람 문화에 대한 적대심이 더 극대화된 글이기도 하다. 장 작가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조롱과 풍자에서 기인한 모욕 때문이 아닌 자극에 대한 자동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자가 강간을 당해도 먼저 성적 자극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여자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는 이슬람 율법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가진 죄책감은 정의를 왜곡시키기 때문에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죄책감은 무슬림들에 대한 진보 진영의 생각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이 서구 세력에 의해 받은 피해에 대해 좌파들이 스스로 짐을 지려하기 때문에 그들의 부채의식이 이슬람의 잘못을 눈감게 한다는 뜻이다.
(“‘이슬람 테러’에 대한 지제크의 긴급 발언”, 한겨레, 2015년 3월 5일)
장 작가 주장의 가장 큰 오류는 이분법에 있다. 샤를리 에브도 혹은 쿠아시 형제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장 작가는 샤를리 에브도의 보도 행태를 문제 삼는 것은 테러와 이슬람 문화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그 사회에서 태어난 프랑스 이민족 2세의 계층문제를 건드리는 것도 테러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식에는 테러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인류보편적 상식 혹은 절대명제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맞는 얘기다. 피의 복수는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보편적 상식이 이분법을 항상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두 편의 글은 서평에 원래의 목적이 있었지만 장 작가의 평소 지론을 설파하는 글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 글을 관통하는 공통된 생각은 ‘나쁜 이슬람 극단주의’, ‘비상식적인 이슬람 문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토를 다는 진보-좌파 진영의 논의들은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장 작가가 가진 이분법적 인식은 샤를리 에브도의 보도행태와 테러를, 사회 구조적 문제와 테러를 떨어뜨려 보기 힘든 편협함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보도행태와 사회 구조의 문제를 논한다고 해서 테러의 본래 의미나 책임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테러가 발생해선 안 된다는 것이 더 강한 상수로 자리 잡는다. 샤를리 에브도의 자극적이고 모욕적인 보도가 무슬림들에게 큰 상처였다는 문제제기는 테러의 당위성과 연결될 수 없다. 사건 이전부터 주기적으로 제기됐던 것처럼 샤를리 에브도의 보도 행태에 대한 문제제기는 언제나 가능하다. 또한 극단적 테러는 코란의 정신(성전)이 아니라는 이슬람 지도자와 보통의 무슬림들의 지적도 이분법적 의심을 사그라지게 한다. 상처를 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 테러는 테러라는 것이다. 사회 구조의 문제에 대한 논의도 테러의 죗값을 낮춘다고 보기 힘들다. 청년들이 테러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접근이지 사회 시스템에 대한 테러였다는 것을 밝히자는 것이 아니었다.
테러라는 절대 명제 뒤에서 파생적 논의를 무력화하는 것은 그가 지적했던 죄책감으로 인한 밑 모를 관용보다 문제가 더 크다. 파생적 논의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도이지 대상을 왜곡하자는 시도가 아니다. 장 작가가 언급한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당위성을 주장한 진보 진영의 논의가 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백번 양보해)그런 사례가 일부 있다손 치더라도 대부분의 논의는 테러가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덧붙여 장 작가가 자신의 지론을 강조, 보완하려고 무던히 애쓴 흔적은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용>에 관한 글에서는 마지막 문단에 가서야 관용이 사회 내부적 적대를 차이로 치환해버린다는 저서의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관용이 근본적인 해결을 회피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장 작가의 이분법적 인식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 해결의 의미 부여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매개로 한 장 작가의 글에 대해서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반박 글이 있었다. 장 작가가 자신의 주장을 강조・보완하기 위해 무리하게 지젝의 아이디어를 편취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장정일은 지제크를 물구나무 세웠다”, 한겨레, 2015년 3월 16일)
장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외국의 유명 석학들의 생각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장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나는 샤를리다’가 아닌 ‘나는 안티이슬람주의자다’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쉽게 떨치기 어렵다. 결국 논지 전개 결함에 대한 불편함을 모두 떨쳐버리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증오, 넓은 의미에서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불편함이다.
장 작가는 이 교수의 반박문에 재반박하는 글을 공개했다. 이 교수의 반론에 대한 적절한 재반론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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