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촛불집회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습니다. 광화문과 무대 사이에 있는 사직로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도로점거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이었죠. 일렬로 늘어선 전동휠체어가 왕복 8차선 도로를 가로질렀고 차들은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장애인등급제 폐지’ 같은 요구사항이 담긴 플래카드와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무대 뒤편에 자리잡고 있던 416가족협의회 구성원들과 시민들은 그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주 큰 경적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상행선 가장 끝 차선에 있던 고가의 자동차 운전자는 차창을 내리고 구호를 외치는 이들을 노려봤고, 한 손으로 연신 경적을 눌러댔습니다. 그 차선을 가로막고 있던 운동가는 놀라서 길을 터주었고, 그 차선을 시작으로 하나둘 차선이 뚫리기 시작했죠. 이 퍼포먼스는 단지 2~3분 동안 진행됐을 따름인데, 타인의 권익에 그토록 무감했던 운전자가 참 야속하게 느껴졌죠.
사실 지금까지 택시업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택시 업계가 어려운 것은 기본적으로 택시운전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이들의 규모가 시장의 수요를 초과한 현실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택시업계는 자구노력을 보이지 않았죠. 사실 이것은 택시운전사들 개개인이 사업자 특성을 갖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법인이나 조합들이 수수방관해왔던 측면이 있었죠. 상황이 안 좋아지다보니 택시운전사들도 ‘돈이 안 되는 손님’들은 꺼리는 잔머리를 굴리게 됐고 팍팍해진 매출은 그들의 얼굴을 굳어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새로운 서비스들이 ‘4차산업’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사업자들이 기존 택시 이용자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들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쏘카의 이재웅 대표가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지난 2월 15일 이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홍남기 기재부장관을 비판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을 읽던 중에 덜컥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공유경제가 중요하다면 이름뿐인 사회적대타협기구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대타협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모빌리티의 이용자가 빠지고 카카오와 택시4단체와 국회의원들이 모인 기구를 사회적 대타협기구라고 명명한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수십만 택시기사가 있다고 하지만 수천만명의 택시 이용자가 있습니다.”
놀라운 주장이죠. 수십만 택시기사 권리와 수천만명의 택시 이용자들의 권리를 같은 층위에 놓고 비교하는 이 대표의 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천만이 수십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라는 점은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권리가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점은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달인 3월에는 택시4단체, 정부여당, 카카오모빌리티, 국토부 등이 참여해 이뤄낸 합의를 문제 삼는 글을 게시합니다. 그 글 중간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합의를 들여다보면 혁신을 규제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국민의 편익이 어떻게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택시의 부족한 서비스정신과 공급부족, 승차거부에 지친 국민들이 이번 합의로 어떻게 나아진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존 택시업계와 기사들이 규제만 풀면 친절해지고 공급을 늘리고 승차거부를 안 한다는 건가요?”
이 대표의 글들을 죽 보다보면 ‘이용자편익’과 ‘국민편익’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들을 종합해보면 ‘기존 택시 산업은 이제 사라질, 사라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산업이고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는 데 장애물로 기능하는 모든 것은 불합리’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새로운 서비스의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고, 기존 택시 서비스, 그러니까 이용자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낡은 서비스는 사라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점차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타다’가 새로운 사업영역을 창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법적 규제를 묘하게 피해 사업할 수 있는 영역을 찾은 것이죠. 현행법에서는 자동차대여사업자가 임차인에게 운전자를 알선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예외가 있습니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 18조에 따르면 ‘외국인, 장애인, 65세 이상 고령자, 11인~15인 승합차 임차인’ 등 임차인의 조건에 따라 운전자를 알선할 수 있도록 허용되고 있습니다. 11인~15인 승합차를 대여할 때 운전자를 알선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짐이 많은 국내 방문객,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관광산업 발전이라는 명분에 따른 것이었죠. 이런 예외 조항이 있었기에 '타다'의 우회적 서비스가 가능했던 겁니다.
이 대표는 지속적으로 ‘공유경제’의 가치를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타다' 서비스가 과연 공유경제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공유경제는 서로 다른 수요를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랫동안 비어있는 집을 숙소로 제공한다든지, 출퇴근시간에 카풀을 하는 경우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타다'는 기존 택시 승객과 운전자를 연결하는 것 이외에 어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존 택시와 달리 승차 거부도 없다’는 게 ‘타다’의 마케팅 포인트인데 이것이 대단한 혁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질적으로는 기존 택시 서비스에 포장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이 대표에 대해 “결국 ‘나는 달려가는데, 왜 못 따라오느냐’라고 하는 거다. 상당히 무례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적이 있었죠. 최 위원장이 강조한 ‘이기적’, ‘무례’라는 표현에는 이러한 맥락이 깔려 있습니다. 과연 기존 택시산업에 대한 불만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운전사들의 생존권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인가. ‘국민편익’과 ‘고객편익’을 혼용하면서까지 강조하는 불분명한 가치가 과연 대단한 혁신에 의한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장애인들의 점거 퍼포먼스를 뚫기 위해 경적을 울려댔던 그 운전자는 장애인들의 권리를 위해 단 2, 3분 내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운전자와 이 대표가 겹쳐져 보이는 것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있는 대상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무심함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 무심함을 넘어,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그 상대방에게 살벌한 배타성을 보이는 매정함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러한 태도의 끝에는 사람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대기업, 재벌 중심 경제의 구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더욱 씁쓸한 것은 성공한 벤처 1세대 기업가에게서 다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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