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의원은 생전에 참 많은 어록을 남겼다. 최근에 그의 어록 중에 많이 회자되는 것이 있다. “사실 한국하고 일본하고 서로 사이도 별로 안 좋지만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연대해야 되지 않습니까.” 총선을 며칠 앞둔 시점에 한 지상파 토론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이었다. 지금 노회찬 의원의 이 어록은 일본의 억지스러운 경제 침략에 맞서 국민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일본의 경제 침략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감정적,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번 다시 생각해볼 사실이 있다. 우리는 왜 일본을 가깝게 느꼈는가. 일본을 혐오하거나 저주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특히 고령층에게 뿌리 내린 반공, 빨갱이혐오 정서의 직접적인 뿌리는 한국전쟁의 공포였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타고 올라가면 일본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35년의 일제 강점의 끝은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망에 따른 것이고 이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착한’ 구성원들은 일제 강점의 역사를 너무나 빨리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 듯 했다.
그러는 와중에 스스로를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고 강변하는 일본 우익 권력자들은 한반도 상황을 자신들의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북한은 무력을 과시하는 괴수의 소굴이며 일본 국민을 납치한 적국 개념으로 이해됐다. 일본 자민당 집권세력은 북한발 위기론으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강화했다. 북한이 한창 미사일 실험을 하던 때에는 대피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한반도 유사시에 자국민 대피를 목적으로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하는 시나리오도 준비됐다. 최근 북미 평화기류가 흐르자 ‘공포의 대상’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로 확장됐다. 이번 경제적 침략행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한반도 두 체제가 끝나거나 그 대립이 영향력을 갖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계산된 반발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두 국민 정책은 존재했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에게는 비록 한 줌일지라도 권력을 줬고, 조금이라도 반기를 든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인 탄압을 가해 본보기로 삼았다. 대립되는 두 모습을 제시하며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동시에 한민족이 서로 반목하는 결과도 빚었다. 일제에 순응한 사람들은 강한 일제에 흡수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라며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비난했다. 반대로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 혹은 일제 2등 국민으로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민족반역자들을 비판했다. 이렇듯 일제는 한반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문제는 광복 이후에도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일제의 잔재,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친일파들은 혼란의 시기를 틈타, 그리고 한반도를 지배하던 세력의 부름을 받아 ‘영민하게’ 권력을 다시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향할지 모를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렸고, 그때 활용된 것이 ‘빨갱이’이라는 마법의 단어다. 이들은 빨갱이 사냥을 하며 빨갱이로 ‘몰리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보여줬다. 도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으면 빨갱이’가 되던 때였다. 마치 일제에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일제가 이미 보여줬던 것 같이 친일파들은 공포정치를 펼쳤다.
흥미로운 지점은 남북이 평화에서 멀어지는 것이 한국과 일본 양국의 우익들에게 호재로 작용하는 역사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한국의 우익은 북한에 돈을 지불하며 휴전선에서 총격전을 벌이려 했다. 남북긴장 상황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일본 우익은 자신의 영해나 일본 상공을 지나는 미사일을 핵심적 위협요인이라 선전하며 선거에서 표를 끌어 모았다. 일본의 경제적 침탈 행위가 시작된 직후 자유한국당은 강국인 일본을 자극해선 안 됐다며 청와대와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국민적 여론이 일본을 성토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자 초당적 협력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허나 여전히 일본을 자극하면 국익에 좋지 않다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다.
현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의 잘못을 바로잡고 있다. 동시에 멈춰있던 한반도 프로세스를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흐르고 2년 여 만에 불거진 것이 한국과 일본의 대립이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 부조리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강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 노회찬 의원은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일본과도 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연대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반대하는 세력과 맞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야말로 단순한 이치다. ‘진실한’ 지지자를 찾을 필요도, ‘순수한’ 우리편을 찾을 필요도 없다. 가능성이 있다면 최대한 우리편을 많이 만드는 것이 이길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구도가 형성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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