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경제’를 이어받은 이명박, ‘독재 향수’를 상징하는 박근혜, 이 두 사람이 대통령의 권위를 잃으며 박정희, 육영수의 시대가 저무는 중이다. 두 줄기의 과거 기억을 붙들고 있던 보수세력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보수진영의 나름 머리 큰 인사들은 책임을 지는 대신 자신들의 보신을 택했다. 모르는 척 뭉개고, 오래 되지 않은 과거를 잊은 척 태연히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굳이 모든 원죄를 털어내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보수진영은 마일리지를 쌓아나가고 있다. 다만 그들이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점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 진영이 갈등을 겪을 수 있는 요소들을 적립해나가는 방식이라는 점이 문제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이 시험을 잘 봐서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점수를 떨어뜨리는 것, 결과적으로 전체 평균을 낮추는 방식이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의 공격 포인트는 진보 개혁 진영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특정영역 혹은 특정 인사를 향한 핀셋 공격이다. 대통령 지지자 혹은 민주당 지지자 중 일부가 동요할 수 있을 만한 공격 포인트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대한 적대 이미지 씌우기를 들 수 있다. 과거 조중동과 매경, 한경 등 경제지는 민주노총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우곤 했다. 한국노총(한국노총조합총연맹)에 비해 보다 급진적인 활동을 해왔던 민주노총은 보수, 경제지의 주 공격포인트였다. 민주노총이 파업 혹은 집회에 나설 때면 ‘국민을 볼모로 한’, ‘기업의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귀족노조’와 같은 수식어가 동원됐다. 보수, 경제지들은 국내 노조 가입률이 10.3%에 불과하다는 점보다는 민주노총 집회에 쇠파이프가 등장했다는 점에 집중한다. 또 국내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면서도 밤늦은 시각, 높은 빌딩 사무실에 불이 꺼지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시한다.
최근 자유한국당은 서울교통공사 직원 중 친인척 관계가 다수 발견됐다며 ‘고용세습’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후 자유당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안이 진행된 것과는 별개로 의혹은 노조와 연결됐다. 18일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특권층 노조와 결탁해서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서 중앙정부는 청와대, 지방정부는 서울시 그리고 특권층 노조는 민주노총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자유당의 이러한 공세는 여러 해석을 낳았다. 문재인 정부를 친노조 정부로 규정하고 ‘고용세습’의 책임을 정부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또 민주노총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친기업적 행보를 보인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런 해석들도 타당하지만 더 본질적인 바람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노총이 문재인 정부, 여권 지지층과 분리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청와대에 요구를 하는 것에 여권 지지층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노동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민주노총의 생각과 ‘개혁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지층의 생각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보수진영 내에 ‘민주노총이 과거 정부 수준으로 청와대와 각을 세우고, 대통령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상황’이 오길 바라는 기류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보수야당 입장에서는 이것이 정말 ‘손 안 대고 코 푸는’ 국면이 될 것이 때문이다.
보수, 경제지는 오래 전부터 마일리지를 쌓았다. 단적으로 민주노총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 씌우는 작업은 그들이 생산하는 기사 제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표는 네이버를 통해 유통된 기사 제목 중에서 ‘민주노총’과 ‘민노총’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건수를 나타낸 것이다.
보수지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경제지인 매일경제, 한국경제는 ‘민노총’이라는 약칭을 많이 사용한 반면 진보 성향 언론으로 분류되는 경향, 한겨레, 오마이뉴스는 ‘민주노총’이라는 약칭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최저임금, 자영업자 기사가 폭증했던 지난 6월 30일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사 제목에서는 민노총이라는 약칭만 확인될 뿐 민주노총이라는 약칭은 찾아볼 수 없었다.(네이버 기준) 한편 매일경제와 한국경제는 기사 제목에 ‘한노총’이라는 약칭보다 ‘한국노총’이라는 약칭을 높은 빈도로 사용했다. 매일경제와 한국경제는 한국노총을 각각 190회, 188회 사용했고 한노총을 158회, 96회 사용했다.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새정치민주연합의 약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새누리당은 ‘새정련’이라는 약칭을 사용했다. 당사자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새정치연합’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이라 불러달라며 반발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입장에서는 충청도를 지역 기반으로 했던 ‘자민련’이나 운동권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전대협’, ‘한총련’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당사자가 원하는 호칭으로 부르자’는 합의점을 찾았지만 일부 언론, 인사들은 ‘새정련’, ‘새정연’이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은 우여곡절 끝에 1년 6개월 여 만에 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뀌었다.
보수, 경제지가 ‘민노총’이라는 약칭을 기사제목에 사용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인식시킴으로써 사회구성원과 민주노총을 가르는 것이 1차 효과라면, 민주노총과 문재인 정부, 그리고 그 지지층이 서로 반목하는 것이 2차 효과다. 당장 이런 효과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런 이미지들을 쌓아 나감으로써 종국에는 큰 정치적, 사회적 부담을 발생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오도하는 것은 극우의 오래된 정치 꼼수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사회가 정방향으로 발을 내딛기를 원할수록 관용의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정부가 성공하려면 하늘의 도움만으로는 안 된다. 사람도 도와야 한다. 20~30% 다름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70~80% 유사성을 포용하는 여유도 필요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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