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다. 아직 5판3선승제의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알파고는 이 9단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첫판은 아깝게 진 것처럼 보였다. 이 9단이 소위 ‘떠보기’를 하며 고전했고 막판에 이길 수도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첫 대국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대국은 이 9단이 안정적으로 대국을 했지만 아주 큰 차이로 패배했다. 대국을 해설했던 프로 9단 사범들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진지하게 뒀고 결정적인 패착(패인이 된 수)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알파고가 이 9단을 이겼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알파고가 바둑을 대하는 태도가 두렵다는 것이다. 우선 알파고는 바둑의 역사와 철학을 모두 해체한 뒤 나름의 방식으로 재조립했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두뇌싸움이다. 그래서 수많은 격언과 정석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알파고는 바둑의 모든 철학을 무시한다. 알고리즘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알파고는 스스로 그린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이길 수 있는 결과를 상정하고 거기에 맞춰나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수에 따라 결과를 계속 수정하면서 원하는 결과에 맞춰나가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설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가 ‘저 수는 무슨 의미죠? 왜 저 타이밍이죠?’ 같은 것들이었다. 프로 기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알파고는 확률과 계산에 의지한 채 결과에만 천착하기 때문이다. 알파고가 그린 그림을 중심에 두고 보면 상대방의 착수는 변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가능성만 확보된다면 그림을 그리는데 어디에 먼저 점을 찍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맥락이 없으니 이 9단이 알파고의 행마를 파악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알파고의 바둑은 인간의 바둑 역사와 철학을 무너뜨렸다.
다음 요소는 첫 번째 특징에서 파생된다. 결과의 중요성 때문에 과정이 무시된다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대국과 두 번째 대국에서 해설자들이 몇 번 환호성을 지른 적이 있다. 알파고가 실수를 했고 역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물론 ‘왜 이런 실수를 하지?’라는 반응도 뒤따랐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나눠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초중반의 ‘실수’와 종반의 ‘실수’다. 초중반의 실수라고 보이는 것은 계속해서 최종그림을 수정해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먼저 뒀던 돌이 악수가 되거나 심지어 상대방에게 잡히더라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반면 종반의 실수는 알파고가 이기고 있다는 계가가 완성된 다음 발견된다. 이건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승리에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대신 상대가 따라붙더라도 빨리 승리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했다면 실수는 결코 좋아할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알파고는 실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맛’을 잘 남기지 않고 확정을 지어버린다. 원하는 그림에 지장이 없다면 변수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상황에선 ‘패맛’도 피하는 특성을 보인다.
첫 번째 요소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알파고가 하는 것이 바둑인가?’라는 것이다. 바둑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정신세계가 만나 활발히 대화를 주고받는 교류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로 바둑기사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던 알파고의 수들을 단순히 ‘묘수’라고 판단하기 이전에 알파고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단순히 승리만을 위해 착수한 것이라면 이것을 바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두 번째 요소에서는 ‘과정을 무시하는 인공지능이 실제 인간의 삶에 유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먼저 전제해야 할 점은 인공지능은 양심과 고민, 칸트의 표현으로 하면 ‘정언명령’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무인자동차의 알고리즘이 운전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다면 보행자를 그냥 치고 가는 극단적인 상황도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알파고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인자동차에 사고를 당한 보행자는 최종 목적을 위해 버려는 ‘사석’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알파고의 알고리즘이 승리를 위해 최종 그림을 그리고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가정에서 추론을 해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알파고가 바둑에서 승리를 하는 데에 충분한 경지에 올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왕에 인공지능의 발전 정도를 자랑하고 싶었다면 알파고가 보여줬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상대방과 바둑을 통해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둑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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